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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테크/해외여행

하노이 성요셉 성당, 우버 이용기, 호아로 수용소

by 천수세상 2019. 10. 26.

(2017년 5월 14일 작성한 글)

현재는 우버가 그랩에 인수되었기 때문에

그랩을 사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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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못꼿사원을 가고자 결정.

우버는 가입만 해놓고 쓰지 않고 있었는데 오늘은 우버도 테스트해보기로 했다.

 

첫번째 목적지인 성요셉 성당을 넣고 나서..

카카오택시랑 똑같다...근데 주변 차량이 있는 걸 보여주는게 조금 다른듯.

차종 차 번호, 기사 사진이 뜬다.

 

 

오, 차가 들어온다. 아담한 차군..

 

헐,  이 분은 집에서 밥먹다 나오셨나. 반바지.ㅎㅎㅎ





무사히 도착,

우와 싸다, 39,000동, 2000원 정도인데, 보통 택시였으면 그것도 호텔 하노이 택시였으면, 4000원은 나왔을듯...

게다가 잔돈을 받기가 뭐해서, 항상 몇 천~몇만동은 그냥 더 줬었는데,

결제도 미리 등록된 신용카드로 알아서 되니 엄청 편하다 굿.

메일로 바로 uber 영수증 날라온다.

신용카드 결제 내역도 문자 올테지만, 베트남 심이라 일단 안온다.

 

첫번째 기사님 별 5개 드립니다~!!

 

 

자 이제 오늘의 첫번째 관광 코스  "성요셉 성당"

멋지군.

하노이 성요셉 성당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나온...웹이 블로그들 뿐이다. 왜 그러지?

어쨌든 하노이 대성당 = 하노이 성요셉 성당 이었군.

 

트립어드바이저에 나온 설명..

 

외부 모습

 

일요일이라 그런지, 뭔가 하고 있다

나는 종교가 달라 잘 모르지만, 이걸 미사라고 하는건가??

일단 멀리서 사진 한장, 다들 기도하고 계셔서 시끄럽게 할 순 없지 

 

 

뭔가 끝나더니, 사람들이 줄을 선다..오우 뭐지?

일단 나도 줄 서고..

 

 

아 뭔가 나눠준다...그래서 나도 하나 받아서 사람들 처럼 똑같이 가볍게 기도하고

나왔다...

 

 










그냥 성당 하나라, 가볍게 보고 다음 이동을 하기 위해 우버를 불렀다.

오 이번에도 금방 온다.

아저씨 포스가...선해보이시는군

영어 잘하심, 내가 못하는게 함정.



 

헐, 망했다. 이게 뭐지?

못꼿 사원은 호치민 박물관 들어가는 곳과 동일한 곳이었다.

막혀있어서 동일한 입구에 내려준단다.

지난번 갔을때, 못꼿사원이 있는 줄 몰랐다.

젠장ㅠ

가방 맡기고 또 들어가기 귀찮아서 패스...생각 좀 해보자 후

 

일단 더우니까 망고스무디 한잔 하면서 검색

그래 호아로 수용소 가자...아까 성당 근처다...;;

그래도 가야지..

 

 

 

아 이번에는 여성분이다.

 

치명적인 우버의 단점 발생.

이거이거...저 분 날 지나치고 가버린다.

그런데, 돌아올 생각을 안한다.

교통지옥 하노이에서 여성분 불법 유턴 못하시나 보다.

기다려도 오질 않는다.

 

17,000동 짜리 요금이었는데, 취소하려니, 15,000동이란다.

750원이지만 그럴순 없지.

우버 등록하는 곳에  베트남 현지 번호를 넣는 곳이 없다.

한국 번호만 넣어놨는데 무용지물...;;

숙소 와서 한국심 넣어보니, 이 분 나한테 국제전화 하셨다 ㅎㅎㅎㅎ

 

 

 

호아 로 감옥

[Hoa Lo Prison ]

 

재소자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 수용되었으며 종종 고문을 당했다

베트남의 프랑스 식민 지배자들이 건설한 호아 로 감옥은 대부분 정치범들을 수용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프랑스인들이 '메종 상트랄'라고 불렀던 이 감옥은, 전에는 '호아 로'(화로)라는 가지고 다닐 수 있는 흙 난로를 제조하는 데에 쓰였던 길 위에 지어졌다. 북 베트남이 독립한 후, 이 감옥은 베트남 전쟁 동안 미군 전쟁 포로들(대부분 공군)을 수용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감옥은 두터운 노란색 돌로 지은 건물들 안에 있었다. 입구임을 알리는 위압적인 검은 문은 지역 주민들로부터 '괴물의 입'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감옥의 벽 뒤에서는 처음에는 프랑스인들의 손으로, 그 뒤에는 베트남인들의 손으로 죄수들에 대한 고문과 학대가 자행되었다. 1913년에는 615명의 죄수들이 있었으나, 1953년이 되자 죄수들의 수는 2천 명 이상으로 불어났다. 이들 대부분은 베트민(프랑스 지배 아래에서 베트남의 독립 투쟁을 이끈 조직)의 일원들이었으며, 뜰에 설치된 기요틴이 정기적으로 목을 잘랐다. 

공산당의 전 서기장 도 무오이 역시 예전에 수감되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는 1945년 100명의 다른 재소자들과 더불어 하수도를 통해 탈옥했다. 미군 전쟁 포로들은 1964년부터 수감되기 시작했고, 감옥은 1973년까지 쓰였다. 감옥은 '하노이 힐튼'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아마 가장 유명한 재소자는 미국 상원위원 존 맥케인이었을 것이다. 간수들은 재소자들을 침대에 족쇄로 묶었으며, 제네바 협약을 어기고 고문과 학대를 가했다.

1993년 싱가포르 사업가들이 하노이 타워를 짓기 위해 감옥 대부분을 헐어 버렸다. 오늘날 남아 있는 부분은, 프랑스 지배 하에서 베트남인들이 고통 받았던 상황에 대부분 초점을 맞춘 박물관이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호아 로 감옥 [Hoa Lo Prison]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역사 유적 1001, 2009. 1. 20., 마로니에북스)

 

 

 

호아로 수용소 입구

 

입장료가 30,000동이다. 


팜플렛이 20,000동인데 사놓고 후회했다.

영어란 사실을 망각했다.ㅠ

 

생각보다 넓었다. 구석구석 관람.

유럽인이 엄청 많았다.

프랑스인인가? 특히 나이 많으신 분들이 많은 거 같다.



 

 

여기 사진 찍을때는 쳐다보는 것 같아서 무서웠다 ㅎㅎ



 

 

눈길을 끄는 한가지가 있었다.

아...단두대이다..

guillotine..

guillot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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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illotine(기요틴), 즉 단두대()는 프랑스혁명 훨씬 전인 1100년경부터 나타났지만, 무통() 처형이라는 기술적 혁신을 이루었다고 내세운 프랑스판 단두대, 즉 기요틴이 처음 선을 보인 건 1792년 4월 25일이었다. 이날 기요틴의 성능을 확인하기 위해 참관했던 의사 조제프 이냐스 기요틴(Joseph Ignace Guillotine, 1738~1814)은 "사형수는 고통을 전혀 느끼지 않았습니다"라면서 기요틴이 인도주의적 발명품이라고 주장했다.

guillotine

이 최초의 기요틴 처형이 있은 지 1주일도 되지 않아 파리의 거리에서는 기요틴 모형의 작은 장난감이나 기념품 또는 귀걸이 등이 팔려나갔다. 기요틴의 발명자는 해부학자이며 외과 의사였던 앙투안 루이(Antoine Louis, 1723~1792)로 처음에는 '루이에트(louisettes)'로 불렸지만, 루이에트의 성능을 증언한데다 그런 기계의 필요성을 처음 제안했던 기요틴이 더 유명해지는 바람에 기요틴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기요틴은 죽는 날까지 루이에트를 기요틴으로 부르는 건 부당하다고 항의했고, 사후 그의 가족들은 수년간 법정투쟁을 벌였지만 패소함으로써 기요틴이라는 이름은 역사에 길이 남게되었다. 기요틴 가문은 결국 성을 다른 것으로 바꿔버리고 말았다.1)

오늘날에는 기요틴이 인도주의적 발명품이라는 주장에 공감할 사람이 많지 않겠지만, 당시에는 그렇게 볼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기요틴 이전에는 귀족과 평민의 처형 방법이 달랐지만, 기요틴은 그런 귀족과 평민에게 똑같이 적용됨으로써 그런 차별을 없앴다. 기요틴 이전의 처형 방법은 다양했지만, 1가지 공통점은 사형수의 목숨을 즉각 끊지 못해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점이다. 고통을 가하는 게 주요 목적이었으므로 그건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칼이나 도끼를 사용하여 처형할 때 사형수의 가족은 사형집행자에게 칼이나 도끼의 날을 미리 갈아둬 사형수의 고통을 줄여달라는 뜻으로 뇌물을 주기도 했다. 그런데 기요틴은 묵직한 칼날이 공중에서 아래로 툭 떨어짐으로써, 기요틴의 말마따나 사형수는 고통을 전혀 느끼지 않게 해주었으니, 당시로선 인도주의적 발명품이라는 말이 나올 법도 했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가 1975년에 출간한 『감시와 처벌(Surveiller et Punir)』은 절대 왕정체제하에서 자행되었던 무자비한 형벌의 현장을 자세히 묘사하는 걸로 시작하고 있다. 심장이 약한 사람은 그 부분을 건너뛰고 읽는 게 좋을 것이나, 살아 있는 사람의 육체를 죽어 있는 소고기나 돼지고지 다루듯이 다루었다고 보면 된다. 후자는 요리를 위한 것이지만 전자는 순전히 처벌을 위한 것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왜 오늘날에는 그런 잔인한 형벌이 사라진 걸까? 죄수를 인간적으로 대하기 위해서? 그게 아니다. 사람들이 잔인한 형벌을 받는 죄수에게 동정심을 갖게 되고 그에 따라 권력에 대한 반감이 생겨나게 되었기 때문에 잔인한 형벌 대신 '감시' 또는 '규율'이라는 방법을 택하게 되었다는 것이 푸코의 주장이다.2)

어찌되었든 기요틴이 새로 창출해낸 '인도주의'를 기리고자 했던 걸까? 프랑스에선 사형제가 폐지된 1981년까지 사형 방식으로 단두대를 사용했다. 비록 단두대로 사형에 처해진 마지막 사형수는 1977년 9월 10일에 나왔지만 말이다. 프랑스에서 단두대 처형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수많은 구경꾼을 불러들인 '대중문화'였는데, 공개 처형 대신 비공개 처형으로 바뀐 건 1939년부터였다. 프랑스에서만 단두대를 쓴 건 아니다.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사용되었으며, 특히 단두대에 매료된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는 1933년 단두대 사형장 20개를 만들라고 지시해 1945년까지 1만 6,500명을 단두대 사형에 처했다.3)

[네이버 지식백과] guillotine (교양영어사전2, 2013. 12. 3., 인물과사상사)

 

 

당시에는 이 단두대가 인도주의적 발명품이었다고 한다. 놀랍군..

 




 

 

호아로 수용소 관람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기 위해

이번에는 우버블랙을 불렀다.

프리미엄이니 어떻게 되나 보기 위해 ㅎㅎ

주변에 차량이 많지 않은 관계로 10분 넘게 기다려야 했다.


오 매칭되었다.

그런데, 가격이 나오지 않는다. 블랙이라 그런가..

프리미엄이라고 해서, 에쿠스나 고급차를 생각하면 안된다.

 

일반 우버가 마티즈 급이라면, 우버는 준중형급 이상으로 내부가 깔끔하다.

사실 나도 더 고급차가 올줄 알았다. ㅎㅎ

 

들어오는 마쯔다3

 

 

 

 

우와 비싸다. 진짜 비싸다. ㅎㅎ

피크 타임이라 1.5배라더니

프리미엄 에 피크타임이라서 그런가...

 

일반 우버 3000원 정도면 가고도 남을 거리를, 무려 8000원이 넘는다. ㅎㅎ

그래도 근처에 블랙 차량이 있다면 자주 이용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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